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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호 (2023년 3월) 철학의 시선 각성: 영화 매트릭스 철학으로 읽다
  • 철학과
  • 2024.05.31
  • 196

각성

영화 '매트릭스'(1999)를 철학으로 읽다


박대윤 경상국립대 철학과 박사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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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매트릭스는 1999년 워쇼스키 감독이 만든 sf 장르의 영화로 매트릭스라는 가상의 공간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 이 영화의 철학적인 함의를 다루는 여러 가지 시도들이 있었고, 이 글은 그런 시도 중 하나이다.

  우선 영화는 구원이나 메시아적인 관점을 그려 보여주고자 한다. 첫 장면의 통화장면은 주인공 네오가 자신들을 구원할 그(He, the one)인지 아닌지를 묻고 있다. 구원이 테마인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억압하는 존재와 억압받는 존재가 등장한다. 이때 억압하는 존재는 인간들과의 전쟁에서 이긴 기계문명이고 억압받는 존재는 인류이다. 인류는 기계문명의 동력원으로서 길러지고 관리된다. 매트릭스는 이 동력원으로서의 인류를 관리하는 시스템으로, 영화 초반 나오는 문장인 The matrix has you는 인류가 매트릭스라는 관리시스템 내에서 관리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그렇다면 영화의 초반 대사로도 나오는 질문인 “매트릭스란 무엇인가?” 우선 영화는 인식론적 관점에서 이것을 다룬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앨리스가 경험한 것은 꿈인가 현실인가? 장자와 나비, 호접몽의 이야기를 영화는 반복한다. 매트릭스는 바로 이 문제,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이 순간이 꿈인지, 현실인지를 묻는다. 매트릭스는 가상인가 실재인가? 영화에서 주인공 만큼 중요한 인물인 모피어스는 그리스 신화에서 꿈의 신인 모르페우스을 모티브로 한다. 모피어스는 네오를 만나자 그에게 곧 꿈에서 깰 것이라고 말하는데, 네오가 꿈에서 깬다면 그 현실은 꿈인지 현실인지 어떻게 구분하는가? 철학적인 이 문제는 영화에서는 그렇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영화는 이 인식론적 문제를 바탕으로 우리가 꿈을(가상)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즉 가상을 이용한 인간들의 통제가 문제이다. 인류는 매트릭스라는 가상현실을 통해서 자신이 통제되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노예로서, 기계문명의 동력원으로서 길러진다. 그러나 모피어스에 따르면 네오는 그렇게 통제되고 있으면서도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느끼는 존재로서 묘사된다. 가상의 통제장치에 의해서 통제되고 있다는 것을 거의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 중에서 통제되고 있고,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는 존재는 그 통제장치인 매트릭스가 무엇인지를 반복해서 묻는 존재가 된다. 모피어스는 그런 네오에게 매트릭스는 모든 곳에 있고 진실을 못 보도록 눈을 가리는 세계라고 말해준다. 그렇다면 그 진실은 무엇인가? 모피어스는 그 진실이 ‘사람들이 노예라는 사실’이라고 말한다. 매트릭스는 사람들이 노예라는 사실을 감추는 통제장치인 것이다. 

  이런 관점은 마르크스의 이데올로기라는 개념과 맥을 같이한다. 마르크스는 사회를 하부구조와 상부구조로 나누고 상부구조에서 사람들이 진실을 볼 수 없도록 하는 관념으로서 이념과 대조해서 이데올로기를 말한다. 마르크스는 이데올로기가 사람들이 자신들이 자본주의 내에서 노예로서 살고 있다는 것을 감추는 관념이라고 진단하고 최종적으로 타파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 영화 매트릭스 1편도 이러한 테마와 유사한 전개를 보인다. 따라서 이 이데올로기, 매트릭스를 극복하는 것, 통제에서 벗어나는 것이 문제가 된다.

  그런데 과연 매트릭스가 가상이라는 것을 알기만 하는 것으로 이 통제를 벗어날 수 있는가? 기존의 정치 철학적 관점, 혹은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은 인류가 이러한 이데올로기에 속았다는 것을 기반으로 진실을 알려 그것을 극복할 것을 목표로 하였다. 때문에 계몽이 문제가 되고, 근대적 계몽주의가 자본주의적 세계관에서 지식인층의 지향점이 다시금 된다. 그러나 우리가 매트릭스가 가상이라는 것을 안다고, 그 통제에서 온전히 벗어날 수 있는가? 그리고 과연 우리는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속기만 한 것인가? 영화는 사이퍼라는 인물을 통해서 매트릭스의 통제에서 벗어나는 것이 단순히 매트릭스가 가상이라는 것을 알기만 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사이퍼는 동료들을 매트릭스 내의 관리자들에게 팔아넘기고, 그 대가로 자신은 기억을 지운 채로 다시 매트릭스로 넣어달라고 부탁한다. 

  들뢰즈는 현대 정치철학의 중요한 질문은 여전히 스피노자의 질문에 있다고 말한다. 즉 “왜 사람들이 노예가 되기를 욕망하는가?” 영화에서 사이퍼는 바로 이 욕망을 표현한다. 한편 철학 내에서 진리는 인간의 무조건적 욕망의 대상, 호감의 대상으로 이해되었다. 인간은 진리를 추구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사이퍼의 행태는 바로 우리의 행태, 욕망의 문제를 드러낸다. 우리는 진실에 눈을 감고(혹은 진실을 왜곡하고) 노예가 되기를 욕망한다. 

  영화에서 네오는 이런 노예 상태의 인류를 구원할 메시아로 이해된다. 그리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그가 매트릭스라는 통제장치를 벗어날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영화는 그렇게 네오가 매트릭스를 넘어서는 존재가 되어가는 과정을 그려 보여주며, 인류를 구원할 메시아로 각성하는 드라마를 펼친다. 

  그런데 그가 각성하는 것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일종의 예언가로 보여지는 오라클이라는 존재는 네오와의 첫 만남에서 네오가 그(He)가 아니라고 말해준다. 그러면서도 몇몇 단서들을 다는데, 거기엔 ‘죽음과 관련된 선택’, ‘다음 생(生)’과 같은 것이 있다. 각성은 일종의 새로 태어나는 것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관점은 현대인이 사회시스템의 통제를 벗어나기 위해 새로 태어나야 한다는 관점까지 연장될 수 있을까? 영화에서 네오는 생물학적으로 죽음에 직면하며, 마치 메시아의 환생처럼 다시 태어나서 매트릭스를 넘어서는 존재가 된다. 다수의 민중은 죽고 다시 살아날 수 없다. 그렇다면 이 죽음의 의미는 무엇일까? 

  들뢰즈는 죽음본능이 단순히 생물학적인 죽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시시각각 새로 태어날 수 있다. 우리가 새로 태어난다는 것은 자아, 더 구체적으로는 주체의 죽음을 말한다. 그것은 특정하게 구조화된 주체가 해체되고 새로운 주체가 재조직되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나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어떤 만남, 더 이상 나를 고집할 수 없는 파괴적 충격에 의해서 이루어 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고통을 감당해낸 자만이 새로 태어날 수 있으며, 과거의 나를 망각해 낼 수 있다. 망각도 능력인 것이다. 망각을 해낸 자만이 새로운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영화 매트릭스 1편은 시스템에 통제되고 있지만 시스템 내부의 모순들을 느낀 어떤 존재가 그 시스템을 뛰어넘고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는 각성의 드라마이다. 우리는 이 영화를 통해서 통제를 벗어난다는 것, 자유가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느낄 수 있다. 이 자유는 우리의 삶에 중요한 것이지만, 결코 행복한 것만도 아니며, 어쩌면 고통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직면해야 하는 것으로 우리가 그것을 추구하도록 추동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