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메뉴 바로가기본문으로 바로가기

Nowhere

홈으로 이동 학과소식Nowhere
9호 (2023년 3월) 철학의 시선 상업영화에서 반복되는 칸트
  • 철학과
  • 2024.05.31
  • 228

상업영화에서 반복되는 칸트

정제기 영남대 철학과 객원교수


  이 글에서 나는 생각보다 많은 영화에서 칸트 철학에서 드러나는 도덕적 주체의 모습을 모티브로 삼아 주인공의 캐릭터를 만들어내고 있음을 드러낼 것이다.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다 그렇겠지만, 한 철학자의 이론에 오랫동안 천착해서 공부하다 보면 자신의 시선이 그 철학자의 관점에 맞닿아 있을 때가 많다. 특히 연구자 스스로가 해당 철학자의 입장에 깊게 공감하며 동의할 때는 더욱 그렇다. 나는 개인적으로 칸트철학을 전공했는데, 어느 순간부턴가 칸트주의자가 된 나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칸트와 더불어, 칸트를 넘어 사유하는 것의 의미들을 오랫동안 고민하다 보니, 본의 아니게 직업병이 하나 생겼는데, 그것은 쉬면서 무슨 영화나 드라마를 보더라도 칸트가 생각난다는 것이다.

  가장 최근에 칸트를 떠올렸던 영화는 「서울의 봄」 이다. 주지하다시피 「서울의 봄」은 10.26 사건으로 인해 박정희가 김재규의 총탄에 쓰러진 직후의 이야기로, 전두환과 하나회가 어떻게 군사반란을 일으켰는지를 세심하게 다루고 있다. 물론 어느 정도는 과장과 미화가 섞여 있겠지만, 정우성 배우가 연기한 이태신(당시 수도경비사령관을 맡았던 장태완 소장을 모티브)은 전형적인 칸트주의자다. 칸트의 용어로 표현하자면, 전두광의 군사반란과 횡포라는 여러 주관적 제한과 방해에도 불구하고, 수도경비사령관이자 군인으로서 자신이 해야 할 의무에만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여타 다른 장성들이 두려움 때문에 자리를 이탈하여 숨거나 회유되는 것에 비해, 이태신은 그저 “군인이기 때문에” 전두광의 군사반란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작품 내에서 이태신이 “군인이기 때문에” 수행한 모든 행동들은 “해야만 하기 때문에” 하는 행동이라는 점에서, 즉 “의무로부터 나온” 행동이라는 점에서 정당화되며, 숭고한 가치를 지닌다. 그렇다면 이태신의 의무는 어떻게 칸트적인 방식으로 정당화되는가?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설명을 살펴보자.

  칸트는 『도덕형이상학 정초』에서 선의지der gute Wille의 특징을 설명하기 위해 의무Pflicht 개념을 도입한다. 의무는 “해야만 하는” 무조건적인 명령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정언명령의 다른 설명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칸트는 이러한 의무 개념을 보다 분명하게 설명하기 위해 “의무에 맞는 행위pflichtmäßge Handlung”와 “의무로부터 나온 행위Handlung aus Pflicht”를 구분하면서 그 유명한 상인의 예시를 든다. 칸트에 따르면, 영리한 상인이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어린 아이나 돈 계산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지체장애인에게 바가지를 씌우지 않고 정직하게 정가대로 돈을 받는 행위는 “의무에 맞는” 행위일 수는 있다. 예를 들면, 만약 이 과정에서 자신의 신용도가 높아져서 손님들이 더 많이 몰릴 것을 기대한다거나, 혹은 이 손님의 환심을 사고자 하는 다른 목적이 있었거나 하는 경우가 이러한 “의무에 맞는” 행위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 경우는 비록 칭찬을 받아 마땅할지는 몰라도 결코 “의무로부터 나온” 행위, 즉 도덕적으로 선한 행위는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유일하게 도덕적으로 선한 행위일 수 있는 “의무로부터 나온” 행위는 이 행위로 말미암아 어떤 결과가 기대될 수 있는지를 결코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도덕적으로 선한 의무는 오직 해야만 하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하려고 하는 “의욕의 원리” 때문에 도덕적 가치를 지닐 수 있을 뿐이다.

  주인공의 행동이 칸트적인 의미에서 의무를 다하기 때문에 숭고하게 여겨질 수 있는 작품은 그 이외에도 많다. 그 중에서도 나는 『겨울왕국 2』를 이야기하고 싶은데, 이는 “칸트적인, 너무나 칸트적인” 영화이기 때문이다. 『겨울왕국 2』를 지배하는 근본적인 정서는 바로 “의무Pflicht”와 “희망Hoffnung”에 대한 정서이다. “엘사”와 “안나”는 『겨울왕국 2』에 이르러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칸트주의자로 거듭났는데, 왜냐하면 『겨울왕국 2』 전체를 관통하는 주된 주제가 바로 “해야만 하는 일을 하는 것do the next right thing”이기 때문이다. 두 자매는 자신이 “해야만 하는 일”, 즉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몸부림친다. 두 자매가 이 의무를 수행하는 것에는 다른 이유가 없다. 그저 해야만 하기 때문에 그렇게 할 뿐이다. 이는 칸트가 그토록 강조하는 무조건적인 명령인 정언명령der kategorische Imperativ을 연상시킨다. 

  엘사와 안나 두 자매들이 “해야만 할 일the next right thing”에 대해 이야기할 때, 가언적인 태도를 취했는가? 아니면 정언적인 태도를 취했는가? 물론 누군가는 이 자매들이 의무를 수행하는 이유는 바로 “아렌달 왕국을 구하기 위해서”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이것을 영화적인 장치에 불과하다고 보는 쪽이다. 엘사가 트롤들의 경고를 들으면서 왜곡된 과거를 바로잡기로 결정하는 행동, 그리고 마법의 숲에서 아렌달 군인들과 노덜드라인들에게 반드시 마법의 숲에 걸린 저주를 풀고 여러분들을 자유롭게 해 주겠다고 말하는 행동들은, 이 행동의 결과로 인해 엘사 자신에게 어떤 이익이 돌아갈 수 있을지를 고려하면서 수행한 것이라고 보기에는 매우 곤란하다. 실제로 엘사는 영화 전체를 통틀어 자신의 의무를 수행하면서 상대방에게 어떤 보답도 바라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엘사는 오히려 자신이 아렌달의 여왕으로서, 또 아렌달 왕인 아버지와 노덜드라 출신 어머니의 자녀로서 자신이 해야만 할 의무를 다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아렌달을 구함으로써 얻은 행복이나, 노덜드라의 여왕이 된 것들 등은 칸트 식으로 표현하면 “도덕법칙에 따라 행동한 결과로서 주어진 것”이지, 결코 엘사 자신의 “순수 의지를 규정한 것”이 아니다. 만약 내 이러한 해석이 옳다면, 엘사는 단순히 위에서 언급한 “의무에 맞는” 행동을 한 것이 아니라, “의무로부터 나온 행동”을 수행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나는 마블 영화 시리즈에서 등장하는 “캡틴 아메리카” 역시도 칸트적 인간의 전형임을 말하고 싶다. 이는 『캡틴 아메리카 - 시빌 워』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하는데, 왜냐하면 이 영화에서 등장하는 대립과 갈등의 구조가 공리주의 대 의무주의의 문법을 거의 그대로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빌 워』에서 아이언 맨은, 어벤져스 팀이 빌런들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실수를 하여 소코비아 사태에서 지나치게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던 것에 죄책감을 느낀다. 그래서 소코비아 협정을 통해, 어벤져스 팀이 통제를 받아야 한다는 쪽의 입장에 동의한다. 이는 국제 연맹과 같은 기구의 판단을 통해, 가능한 한 적은 피해를 받는 쪽으로 출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의 원리를 중시하는 공리주의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이에 반해, 캡틴 아메리카는 이러한 국가 기관의 통제가 어벤져스 팀의 자율성과 판단을 무시하게 될 가능성이 있음을 지적하면서, 이러한 통제는 결국 국제 연맹의 입맛에 맞는 사람들만을 선별적으로 구하게 될 수 있을 가능성, 또 다른 중요한 누군가를 위해 덜 중요한 누군가의 희생을 강요하게 될 수 있을 가능성 등을 이유로 소코비아 협정에 따르기를 반대한다. 결국 이러한 사상적 차이는 캡틴 아메리카와 아이언 맨의 대립으로 이어지며, 이는 영화를 풀어가는 매우 중요한 키워드가 된다.

  이처럼 상업영화에서 칸트적 인간은 생각보다 많이 반복된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영화가 아닌 다른 매체들에까지 영역을 확장하자면, 『왕좌의 게임』의 네드 스타크, 『스토브 리그』의 강두기 투수, 『낭만닥터 김사부』의 김사부, 심지어는 『귀멸의 칼날』의 카마도 탄지로는 선한 의지를 가지고서 자신의 의무를 성실하게 수행하고자 하는 칸트적 인간의 전형이다. 이처럼 대중매체에서 칸트적 인간형의 군상이 계속 반복해서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칸트적 인간의 모습이 매우 매력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칸트적 인간은 어떤 점에서 매력적인가? 이에 대해서 우리는 어쩌면 우리는 선이 부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회에서, 만들어진 캐릭터로나마 이상적인 도덕적 인간의 모습을 향유하고 싶어하는 것은 아닐까를 생각해볼 수 있다. 여러 가지 어려운 주관적인 제한과 방해 하에서도, 자신의 선한 신념을 실현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전진하는 도덕적 인간의 모습은 우리로 하여금 일종의 경외와 숭고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이는 한편에서는 칸트적 인간이 현재 우리의 실제 삶에서는 너무나도 찾아보기 힘든 인간의 유형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 사회에서 너무나도 이 칸트적 유형의 인간이 요청된다는 것을 간접적으로나마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정제기

영남대 철학과에서 칸트의 최고선 개념과 희망철학 연구(2022)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영남대와 감리교 신학대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내세적 희망에서 현세적 희망으로- 칸트 실천철학에서 최고선 개념과 희망철학에 대한 연구-칸트적인, 그러나 너무나 비-칸트적인 - 김남주 시적 주체성의 철학적 원형등의 논문을 학술지에 게재하였다. 인문학&신학연구소 에라스무스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